달리기
삶도 달리기처럼 단순했다면 좋았으련만.
published at: 2020-08-18
diary
최근 몇 주 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 내지 네 번 정도, 한번 달리면 3km를 뛴다. 왜 3km냐면 군대에서 체력 검정을 할 때 최고 등급이 3km에 15분이어서다. 당시에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16분 정도 나왔는데도 부대에서 중간도 못 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달리고 보니 그게 얼마나 엄청난 기록이었는지 모르겠다. 처음 시작했을 때 22분 정도 나왔고 6주차에 들어선 지금은 평균 19분, 빨리 뛰면 18분 정도 나온다.
굳이 달리기를 선택한 이유. 생각해보니 여러 사적인 체험들이 떠오른다. 어릴 적 큰아버지는 나와 사촌동생이 뭔가 잘못을 하면 벌로 아파트 단지를 뛰게 시켰었다. 그런데 사촌동생은 무조건 정해진 바퀴 수를 다 뛰게 하고서 내게는 “힘들면 그만 해도 된다.” 하고 봐 주셨다. 어째서였을까? 슬그머니 멈춰서 숨을 고르는 와중에 사촌동생은 이를 악물고 내 곁을 스쳐 달려갔다. 나는 그때의 미안함과 비겁함을 갚고 싶었던 것일까.
내게 달리기는 비겁함과 자주 연결된다. 약하게 태어났고 운동을 할 때마다 항상 뒤쳐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특히 달리기 같은 운동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했다. 앞서가는 친구들의 등만 보면서 저만치 뒤쳐지는 경험이 수치스러웠으니까. 한편으로 내게 달리기는 따돌림과도 연결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내가 한 살 어린 나이로 입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반 친구들은 나를 교실에 버려둔 채 저마다의 방향으로 달려가며 이렇게 외쳤다. “우리 중에 한 명이라도 붙잡으면 다시 친구 해줄게!” 나는 울면서 친구들을 쫓아갔지만 한 살 많은 친구들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아무도 잡지 못한 채 터덜터덜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그때부터 달리기는 내게 소외와 고립의 다른 말이 되었다.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약속이 내게 던지는 불가능한 희망 같은 것.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왜 지금은 달리기가 좋아졌을까?
나쁜 기억을 걷어내고 달리기 자체만 들여다보면, 우선 체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지금 웹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데 컴퓨터 앞에서 여덟 시간씩 앉아 일한다는 게 생각보다 꽤 힘이 들어가는 일이다. 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그 시간을 전부 맑은 정신으로 집중할 수가 없다. 일주일에 몇 번 정도는 심장이 쿵쿵 뛰고 등이 푹 젖도록 뛰어야 나머지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정신력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매번 목표한 거리를 다 뛰어내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다른 일도 끝까지 마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3km 정도를 달리다 보면 시간에 따라 몸이 변화하는 걸 느낄 수 있다. 처음엔 근육에 저장된 에너지를 쓰는지 팔다리가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다가 1km 구간을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지방을 태우기 시작하면서 온몸에서 땀이 솟는다. 그래서일까, 달리기는 오히려 처음이 힘들다. 그래서 항상 스스로를 격려해야만 한다. 조금만 더 가면 편해질 거야, 지금이 제일 힘든 거야. 그렇게 2km 구간을 다 마치고 나면 한번 쉰다. 그 다음부턴 흔히들 말하는 ‘자신과의 싸움’ 구간이다. 더 뛰어도 다를 게 없고 안 뛰어도 충분하지만 정해진 목표를 채우기 위해 뛰는 시간이다. 다 뛰고 나면 괜히 더 욕심 부리지 않고 곧장 그만둔다. 그렇게 약속을 지켜놓는 편이 다음 달리기를 할 때 내 몸이 말을 듣게 하려면 좋다.
삶도 달리기처럼 단순했다면 좋았으련만
그저 다리가 움직이도록 내버려두고 저만치 앞서나갈 수 있었다면. 오히려 삶은 도우미 없이 투포환 던지기를 연습하는 것과 비슷하다. 온 힘을 다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 뭔가를 던진 뒤, 거리를 확인하고 다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 제자리로 가져오는 것. 그리고 또다시 출발점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가끔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이미 내가 서 있는 땅도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은 6분 15초 정도인 1km 평균 페이스를 5분 내로 단축시키는 게 목표다. 그 다음에는 달리는 거리를 늘려 갈 생각이다. 5km 미니 마라톤 같은 데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이마에 땀이 흐르면 눈으로 들어가서 이마 밴드 같은 걸 장만할 생각이다. 뭘 하든 장비 욕심은 끝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