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보르헤르트, <라디>
그는 이어 해골을 가리켰다. 웃지 말아라. 그렇지만 이것이 나다.
published at: 2020-09-02
book
본문 중에서
오늘 밤 라디가 내 집에 왔다. 그는 전처럼 금발이었고 부드럽고 넓적한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도 전과 다름없이 약간은 소심하고 약간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내 갈래로 가른 금발의 뾰족한 턱수염도 여전히 기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군.
그렇지만 너는 죽었지 않니, 라디. 내가 말했다.
그래. 그가 대답했다. 웃지 말아줘.
내가 웃기는 왜 웃어?
너희들은 늘 나를 비웃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 내 걸음걸이가 어쩐지 우습다고, 그리고 학교 길에서 늘 전혀 알지도 못하는 온갖 여자들 이야기를 한다고 말야. 그 때문에 너희들은 항상 웃곤 했다. 그리고 또 나는 언제나 약간은 겁쟁이였으니까. 나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너는 벌써 오래 전에 죽었지? 내가 물었다.
아니, 천만에. 그가 말했다. 나는 겨울에 전사했다. 그들은 나를 제대로 땅 속에 묻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모든 것이 얼어붙었으니까. 무엇이든 돌처럼 단단히 말이야.
아, 그래. 너 참 러시아에서 전사했지. 그렇지?
그래, 바로 첫해 겨울에. 그렇지만 너 웃지 말아라. 러시아에서 죽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냐. 나에게는 그곳은 모든 것이 낯설다. 나무마저 낯설다. 너도 알듯이 대부분 오리나무인데, 아주 우중충해. 내가 누워 있는 곳에는 우중충한 오리나무밖에 없다. 그리고 때로는 돌까지도 신음 소리를 내지. 돌도 러시아의 돌일 수밖에 없으니까. 숲도 밤이면 신음을 한다. 이것도 러시아의 숲일 수밖에 없으니까. 눈도 비명을 지른다. 그도 역시 러시아의 눈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 모든 것이 생소하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낯설다.
라디는 내 침대 가에 앉더니 말을 그쳤다.
아마 네가 거기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모든 것이 미워지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아, 그렇지 않아.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다. 모든 것이. 그는 자기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것이 너무 낯설어. 사람까지도.
사람까지도?
응. 제발 웃지 말아. 그것은 정말이다. 정말 사람까지도 말할 수 없이 낯설다. 너 제발 웃지 말아. 사실은 그 때문에 오늘 밤 너를 찾아온 거니까. 나는 그 문제를 한번 너와 상의해보고 싶었어.
나하고?
응, 제발 웃지 말아. 꼭 너하고 말이다. 너는 나를 잘 알지 않니?
나도 그렇게 생각이야 해왔지만.
아무래도 괜찮아. 너는 나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나는 지금 내 겉모습을 묻는 거야. 내 상태가 아니고. 내 말은 내 겉모습이 어떠냐는 것인데, 어때, 너 정말 나를 알아보지, 응?
그래, 너는 금발에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아니지. 안심하고 말해. 부드러운 얼굴이라고. 내가 잘 아니까. 그러니까 -
응, 너는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늘 웃고 넓적한.
그렇지, 그래. 그 다음 내 눈은?
네 눈은 항상 좀, 좀 서글프고 기이한 느낌이었어.
너 속이면 안 돼. 나는 무척 근심스럽고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여자 아이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너희들 모두가 믿을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 다음은? 내 얼굴이 말끔했었니?
아니, 그렇지 않았단다. 너는 늘 턱에 두 갈래의 뾰족한 금발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너는 그것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늘 그 수염을 쳐다보았지.
그래서 웃었군.
그래, 웃었지.
라디는 내 침대 가에 앉아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지르고 있었다. 응, 그랬어. 틀림없이 그랬어.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갑자기 근심스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겠지. 응? 그렇지만 제발 웃지는 말고. 나와 같이 가자.
러시아로?
그래, 아주 빨리 갈 수 있으니까. 잠깐이면 돼. 너는 나를 잘 아니까. 자.
그는 내 손을 잡았다. 그에게서는 눈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아주 싸늘했다. 아주 푸석하고 가벼웠다.
우리는 두 그루의 오리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거기 어떤 허연 물체가 누워 있었다. 자, 여기 이것이 나다. 라디가 말했다. 거기에는 내가 학교 시절부터 본 일이 있는 사람의 해골이 있었다. 그 곁에는 녹갈색의 금속 물체도 하나 놓여 있었다. 저것은 내 철모다. 완전히 녹이 슬고 이끼가 끼었지. 그가 말했다.
그는 이어 해골을 가리켰다. 웃지 말아라. 그렇지만 이것이 나다. 그가 말했다. 이것을 알아볼 수 있겠지? 너는 나를 잘 아니까. 여기 이것이 나인지 네 입으로 말해봐라. 어때? 끔찍하리만큼 이상해 보이지 않아? 나라고 인정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아무도 나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어. 그렇지만 여기 이것이 나다. 정말 틀림없는 나야. 그렇지만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 너무나 생소하다. 지난날의 나와는 이제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아. 아니, 웃지 말아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 생소하고 너무나 불가사의하고 너무나 막연하다.
그는 검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슬픈 듯이 멍하니 앞을 쳐다보았다. 지난날은 이제 아무 상관이 없다고, 아무것도, 전혀 아무 관련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 다음 그는 손가락 끝으로 검은 흙을 약간 파내어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상해. 아주 이상해.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흙을 나에게 내밀었다. 흙은 앞서 나를 붙잡았던 그의 손처럼 몹시 싸늘하고 푸석하고 아주 가벼웠다.
냄새를 맡아봐. 그가 말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때?
흙이로군.
그리고?
약간 시고 약간 쓴 보통의 흙인데.
그렇지만 이상하지? 아주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몹시 역겹지, 안 그래?
나는 흙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흙은 싸늘하고 푸석하고 가벼웠다. 약간 시고 약간 쓰디쓴 냄새가 났다.
냄새가 좋은데. 내가 말했다. 흙 냄새야.
역겹지 않아? 이상하지 않아?
라디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몹시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느냐 말야.
나는 다시 냄새를 맡았다.
아니, 다 같은 흙 냄새인데.
그래?
틀림없어.
그리고 역겹게 느껴지지도 않는단 말이지?
응, 아주 좋은 냄새야. 라디, 너도 다시 한번 자세히 냄새를 맡아봐.
그는 손가락 사이에 흙을 조금 집어서 냄새를 맡았다.
흙은 다 이런 냄새가 나니? 그가 물었다.
그럼, 전부 그런 냄새야.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흙을 든 손바닥에 코를 바짝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네 말이 맞다고 그는 말했다. 아주 좋은 냄새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내 몸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해진단 말야. 그래, 아주 섬뜩하게 이상해.
라디는 앉아서 냄새를 맡았다. 내가 있는 것도 잊은 채 냄새를 맡고 또 맡았다. 그럴수록 그는 이상하다는 말을 점차 덜하게 되었다. 이상하다는 말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그는 자꾸만 자꾸만 냄새를 맡았다.
이때를 틈타 나는 발뒤꿈치를 가만히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다섯시 반쯤 되어 있었다. 앞뜰에는 눈이 덮인 틈으로 흙이 보였다. 나는 맨발인 채로 눈 속의 검은 흙을 밟았다. 흙은 싸늘하고 푸석하고 가벼웠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나는 서서 숨을 깊이 들이켰다. 정말 흙에서는 냄새가 났다. 좋은 냄새야, 라디. 내가 속삭였다. 정말 좋은 냄새야. 틀림없는 흙 냄새야. 안심해도 돼.
짧은 평
볼프강 보르헤르트. 1921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배우 수업을 받던 도중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고 스물여섯에 요절하고 말았다. 2년 간의 투병 생활 동안 짧은 단편들을 남겼다. 주로 전쟁의 상처를 노래하는 글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