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냐 플라스푈러, <조금 불편한 용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published at: 2020-10-01
book
100자 평
용서란 무엇인가? 란 주제를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나치 수용소 이야기로 풀어낸 에세이. 이론적인 주제가 많지만 작가의 스토리가 가미되어 받아들이기 좋았다.
어머니를 이해하려는 철학자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저자의 개인적 체험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어린 시절,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해 집을 떠나버렸다. 그렇게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거듭했다. 자신의 가정을 떠난 어머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녀는 직접 결혼해 아이를 낳을 때까지도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긴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고심하고는 했다. 이 책은 그녀의 깊은 고민의 결실이다. 책은 세 가지 커다란 주제로 용서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용서는 이해한다는 것일까, 사랑한다는 것일까, 망각한다는 것일까?
데리다 vs 아렌트, 대척점에 놓인 용서의 원리
저자는 용서의 관점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다. 하나는 자크 데리다가 말한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용서이다.
21P.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사실상 그것이야말로 용서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야말로 용서를 요청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단순하게 용서가 가능한 사소한 잘못들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가해자의 관점에서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될 때, 나 역시도 그럴 만했다고 쉽사리 수긍하게 될 때 빚어지는 것은 용서가 아닌 화해다. 길을 가다가 실수로 누군가의 발을 밟았을 때 정도의 잘못이 그러한 종류다. 하지만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범죄는 그런 식의 용서가 가능할까? 우리는 가해자의 관점을 수긍하고 그들과 화해할 수 있을까? 데리다가 말하는 용서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에 대한 용서. 상대를 향한 모든 복수와 배상을 포기한다는 선언.
반면 한나 아렌트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경계선이 존재함을 꼬집어 말한다.
23P. “‘그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통찰은 분명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용서의 의무 역시도 그 사람이 미리 알았던 악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그 악을 저지른 범죄자와도 관련이 없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른다’는 말은 성경에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가 자신을 처형하는 로마 병사들을 위해 바친 기도에서 나온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자신의 악행의 크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바로 그 점에 따라 가해자가 알지 못했던 죄라면 용서할 의무 또한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렌트는 나치의 전쟁 범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장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의 처형을 집행한 담당자가 극도로 평범한 관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고 이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나는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라는 아이히만의 변명에서, 자신의 죄를 모르는 자의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은 어떨까? 누군가 내게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유대인 학살에 비하면 작은 잘못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상대를 용서하는 게 가능한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야 한다는 역설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그 용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용서는 이해한다는 것일까
저자는 나이가 들고 나서 어머니가 가정을 버렸다는 사실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권리가 한정적이었던 사회에서, 남자가 가정을 버리는 것을 어느정도 용납되었지만 여자가 가정을 버리는 것은 커다란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이겨내고 어머니는 자신의 자유를 찾아 도전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어머니는 재혼에 재혼을 거듭하고도 거듭 가정을 깨트렸다. 아무리 이해를 거듭하려고 해도 가해자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상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존재론적인 상대성을 드러내게 한다.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나의 기준이 세상의 절대적인 척도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관계를 과거로 되돌림으로써 나의 존재를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물론 완전한 되돌림은 불가능하겠지만, 되돌림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 자체가 의미있다.
용서는 사랑한다는 것일까
어머니를 미워하지만,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부정할 수 없었다. 용서라는 건 사랑에 눈이 멀어 이루어지는 비합리적인 증여인 것일까? 누군가를 용서할 때, 우리는 상대의 행위와 상대 자체를 구분짓는 작업을 먼저 행한다. 용서는 그 사람이 자기가 저지른 악행보다 고귀한 존재임을 인정해주는 행위이며, 그런 사람이라는 기대감의 신용 대출과 같다. 다만 이 ‘대출’에는 참회라는 조건이 뒤따른다. 그만큼 당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인정할 테니, 그 대가로 자신의 죄를 참회해야 한다. 하지만 용서의 대가는 참회하는 행위로도 갚아질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살인범이 아무리 참회한다고 한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지는 않으니까. 그리하여 다시 한번 데리다의 절대적 용서가 고개를 든다.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것. 대가를 주고 받는 용서는 그 목적성으로 인해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결국 무조건적인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진정 가능한지는 물론 영영 해결되지 않을 의문점으로 남을 것이다.
용서는 망각한다는 것일까
아무리 커다란 범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만다. 저자도 딸을 낳고 시간이 흐르면서, 늙어가는 어머니를 보며 자신의 미움 또한 망각 속으로 씻겨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용서는 망각의 결과일까? 하지만 망각을 핑계로 죄가 사라진다면 세상에 정의는 없어지고 말 것이다. 저자는 이전 챕터에서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의 행위와 죄인 자체를 구분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죄 자체는 잊어서는 안 되지만 피해자는 자신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망각을 선택하고 거기에서 용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하지만 반대되는 논리가 있다. 죄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면, 그에 따른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 옳다면 그 죄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 배상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의 참회는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배상을 요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망각 또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여기에서 저자는 논리의 전개를 멈추고 나치 희생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끝없는 역설을 대신하려 한다. 완전한 용서도, 완전한 망각도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자유를 택하고 또 부분적으로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마치며
책은 해결되지 않는 질문에 답을 제시하려고 하진 않는다. 단지 용서할 수 없는 사건에 직면한 피해자들의 인터뷰와 증언을 보여주면서 각자가 어떻게 자신의 조건 안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질문에서 시작해 질문으로 책을 끝내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내가 저자의 입장이라고 해도 용서란 이런 것이다, 라는 답을 내린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해한다. 나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일을 겪은 적이 있고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적이 있다. 우리 모두는 나름의 가능한 범위 안에서 죄 짓고 용서하며 살아가야 한다. 완전한 용서는 신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신조차도 용서에 조건을 걸어 두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